사람들은 흔히 자신을 "영적이지만 종교적이지 않다"고 표현합니다. 그게 무슨 뜻일까요?
영적인 '무언가'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고, 물리적 우주가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의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보다 훨씬 더 멀리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한 기독교, 이슬람교, 불교, 힌두교, 중국 전통 종교 등 익숙한 종교에서 제공하는 설명을 어느 정도 거부하고 있다는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이는 사상적 구조에 대한 거부라기보다는 정기적인 예배에 참석하거나 특정 관습을 준수하는 의식에 대한 거부일 수 있습니다.
이는 누군가가 깊이 생각하고 열심히 탐구했지만 아직 설득력 있는 조직이나 체계적인 사고 체계를 찾지 못했음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또는 깊이 생각해보지는 않았지만 '깊이'라고 말하는 것이 '심오하게' 들린다고 생각한다는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자세히 살펴봅시다. '종교'라는 단어는 묶다, 연결하다, 또는 의무를 가진다는 뜻의 라틴어 'religare'에서 유래했을 수 있습니다. 또는 주의를 기울이거나 돌본다는 뜻의 라틴어 "레레게르"에서 유래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 두 단어는 서로 다른 어원이 아니며, 둘 다 헌신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어원에 대한 기사 링크(링크)를 참조하세요.
건설적으로 말하면, 종교는 진리를 배우고 선해지려고 노력하며 하나님의 영적인 사랑과 지혜와 연결하려는 헌신이 될 수 있습니다. 영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종교는 학습과 실천에 있어 좀 더 체계적이고 적극적인 접근 방식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영성은 조금 더 느슨하고 조금 더 수동적으로 들리지만, 여전히 더 높은 것에 대한 감사와 유입에 대한 개방성이 있습니다.
외적인 의식과 준수는 주님과 이웃에 대한 내적인 사랑이 부족하면 공허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쓸모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때로는 "성공할 때까지 가짜를 만들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공허한 행동이라도 진정한 사랑과 지혜가 흘러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을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공허한 행동이 단지 겉으로 보기 좋게 하기 위한 것이라면 공허한 상태로 남을 수 있습니다. 반면에 사랑과 깊은 생각과 감정으로 가득 차서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를 구할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기억에 남는 비유가 있습니다. 누가 복음 18:10-14...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는데,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세리였습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다른 사람들처럼 강탈하는 자, 불의한 자, 간음하는 자, 심지어 이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내 소유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지 않고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 죄인인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고 말하였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의롭게 자기 집에 내려갔느니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모든 교회에 속한 사람들이 완벽할 수는 없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선해지려고 노력하지만 실패와 결점이 있을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배우고 악을 죄로 여기고 적극적으로 피하려는 노력이 없다면 영성에 대한 고백도 공허합니다.
결국 종교와 영성은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종교와 영성은 인간이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선한지 알아내고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방식입니다.


